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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줄어든다는 것은, 마음이 줄어든다는 뜻일까 언제부터였을까. 집에 돌아와도하루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게 된 것이.예전에는 식탁에 앉으면 할 말이 많았다.회의에서 있었던 일, 후배의 실수, 새로운 프로젝트 이야기.하루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이야기가 짧아졌다.“오늘은 어땠어?”라는 질문에“그냥 그랬어.”라고 답하게 되는 날이 늘어났다. 말이 줄어들었다.하지만 삶이 단순해진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마음속에서는 더 많은 생각이 오갔다. 조직에서의 역할이 줄어들고,의견이 덜 필요해지고,결정권이 멀어지는 순간들. 그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조용히 사람을 위축시킨다.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세대다.힘들어도 버티고, 불안해도 내색하지 않는 것이책임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울수록말은 더..
바쁘지 않다는 이유로, 나는 작아졌다 예전에는 하루가 짧았다.아침 회의가 끝나면 바로 다음 일정이 있었고,전화는 끊이지 않았고,퇴근 후에도 머릿속은 일로 가득했다. 그때는 몰랐다.그 바쁨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걸.퇴직 후 처음 몇 주는 좋았다. 알람 없이 일어나고,천천히 커피를 마시고,평일 낮 거리를 걷는 일이 낯설지만 여유로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이상한 감정이 찾아왔다.나는 왜 이렇게 한가한가.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인다. 출근하고, 회의하고, 성과를 내고,무언가를 만들어낸다.그 사이에서나는 멈춰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바쁨을 가치로 배워왔다.바쁜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고,일이 많은 사람은 필요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일정이 비어 있는 하루는괜히 초라하게 느껴진다.누군가 “요즘 뭐 하세요?”라고 물으면답이 길어지지 않..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갔다 퇴직 후 처음으로 회사 근처를 지나간 날이었다.괜히 발걸음이 느려졌다.저 건물 안에서 나는 오랫동안 필요했던 사람이었다.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문득 궁금해졌다.내가 빠진 자리는 어떻게 되었을까.며칠 뒤, 예전 팀원에게서 들은 말은 생각보다 담담했다.“요즘은 ○○차장이 그 일 맡아서 하고 있어요.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잘 굴러가고 있다.그 말을 듣는 순간,이상하게 마음이 서늘해졌다. 서운함이라기보다,무력감에 가까웠다.나는 꽤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내 판단이 방향을 바꾸고,내 결정이 결과를 좌우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조직은 개인 위에 있다. 한 사람이 빠지면다른 사람이 들어오고,프로세스는 유지되고,성과는 계속 쌓인다.회사에 있을 때는 몰랐다. 나의 존재가 구조의 일부였다는 사실을.퇴직 이후에야 알..
퇴직은 끝이 아니라 소속의 상실이다 퇴직을 하고 나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월급이 아니다.소속이다.“어디 다니세요?”라는 질문에잠시 멈칫하게 되는 순간,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더 이상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구나.회사에 다닐 때는 몰랐다.사원증을 목에 걸고 출입문을 통과하는 일이그렇게 큰 의미였는지. 같은 건물, 같은 층, 같은 자리.그 공간은 단순한 근무지가 아니라내가 매일 확인하던 ‘자리’였다. 소속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누군가 나를 같은 편으로 분류해주고,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하고,같은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그 안에서는외롭지 않다.하지만 소속이 사라지면방향도 함께 흐려진다. 아침에 눈을 떠도오늘 내가 어디에 가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누군가와 같은 목표를 공유하지 않고,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다.그때 비로소 드러나는 감정이..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하루가 시작됐다 퇴직을 실감한 건 사직서를 낸 날이 아니었다.아침에 눈을 떴는데,휴대폰이 조용했다.출근 시간에 맞춰 울리던 알람도,“부장님, 이 건 어떻게 할까요?”라던 메시지도 없었다.그날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아, 이제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구나. 퇴직은 공식적인 절차로 끝난다.서류를 정리하고, 명함을 반납하고, 인사를 나눈다. 하지만 관계는 그렇게 정리되지 않는다.처음 며칠은 연락이 온다.고생 많았다는 말, 언제 한 번 보자는 약속.그러나 일주일, 한 달이 지나면그 약속은 조용히 사라진다. 회사에서는 늘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했다.판단을 물었고, 결정을 기다렸고, 책임을 나눴다.나는 그 역할 안에서 단단해졌다.그런데 그 역할이 사라지자이상하게도 능력까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우리는 퇴직을 경제적인 사건으로만 생..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퇴직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한다.“이제 내 인생도 정리되는 거지.”마치 한 권의 책이 끝난 것처럼,한 시대가 조용히 막을 내리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퇴직은 종료라기보다 전환에 가깝다.문제는 우리가 ‘끝’이라는 단어에 너무 익숙하다는 데 있다. 정년은 끝,직함은 끝,회사 생활은 끝. 그동안의 삶이 회사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그 구조가 사라지면 인생 전체가 비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 사라진 걸까.아침에 눈을 뜨는 사람은 그대로이고,경험은 그대로 남아 있고,수십 년 동안 쌓인 판단과 시선도 그대로다. 달라진 건 무대다.우리는 회사라는 무대에서 내려왔을 뿐이다.관객이 사라진 게 아니라,조명이 바뀐 것이다.그럼에도 불안한 이유는새로운 무대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
퇴직 준비보다 먼저 해야 할 것 우리는 늘 이렇게 말한다. “퇴직 준비 잘해야지.”연금은 얼마인지,퇴직금은 어떻게 운용할지,재취업은 가능할지,창업은 괜찮을지.모든 준비가 숫자 중심이다. 하지만 정작 묻지 않는 질문이 있다.나는 회사 밖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퇴직 준비를 경제 계획으로만 이해하면삶의 절반만 준비하는 셈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 이후 가장 힘들어하는 건수입 감소가 아니라관계 감소다. 하루에도 수십 번 울리던 전화가 줄어들고,자연스럽게 이어지던 약속이 사라지고,내가 속해 있던 구조가 조용히 닫힌다. 그때 비로소 깨닫는다.나는 ‘일’을 준비했지,‘나’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회사 안에서는 역할이 나를 설명해줬다.명함이 나를 대신했고,직급이 나의 위치를 알려줬다. 하지만 구조 밖에서는내가 나를 설명..
가장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오랫동안 역할로 살아왔다.회사에서는 팀장이었고,집에서는 가장이었고,어디에서든 책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대신“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했다. 가장은 흔들리면 안 되는 자리라고 배웠다.가족이 기대는 존재여야 했고,불안해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 역할은 분명 의미 있었다.누군가는 그 덕분에 안정감을 느꼈고,누군가는 그 덕분에 성장했다. 하지만 역할에 너무 오래 머물면사람은 점점 사라진다.퇴직 이후 많은 이들이 말한다.“이제는 좀 나를 위해 살고 싶다.”그 말에는 약간의 죄책감이 섞여 있다.마치 그동안 자신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당연한 일이라도 된 것처럼.사실 우리는 한 번도‘한 사람으로 사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늘 누군가..